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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7 10:23

만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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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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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이 있는 철야마을은 백제때 실어산현(實於山縣), 신라때 철야현(鐵冶縣)터다. 지금은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이지만 충분히 옛날 한 현의 치소가 있을만한 터라는 것을 느낄수 있는 마을이다.


만호정은 철야마을 대동계의 시행처이자 마을 민들의 휴식처였으며,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해온 철야마을의 중심이다. 더구나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라도 만호정에 앉으면 만호정의 건축적 특성과 함께 주변의 큰 나무들로 인하여 그 시원한 바람이 가슴속까지 서늘하게 해주는 장소다.

만호정은 지난1997년 보수공사 당시 발견한 4백년전의 상량문에 따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온 국토를 휩쓸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던 1601년 철야마을의 중심을 세우고자 철야마을 무송안(茂松岸), 오죽안(塢竹岸)에 있던 쾌심정(快心亭)을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정자의 이름을 쾌심정에서 남평현의 또다른 이름인 영평을 따 영평정(永平亭)으로 고쳤다고 한다. 당시 상량문은 이천서씨 매곡 서몽희(1543~1611)가 찬한 것으로 당시 정자를 옮긴 내력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만호정은 철야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역사적인 증인이다. 4백여년 전에 쾌심정을 영평정으로 고쳤던 것은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지만, 영평정에서 만호정으로 고쳐부르게 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큰 고을이었던 철야는 통일신라시대 청해진 대사 장보고와 민애와의 격전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고 난후 균정과 제륭의 왕위 쟁탈전에서 실패한 균정의 아들 우징이 청해진으로 장보고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경주로 향했다. 지금의 광주는 당시 무진주로 서남해와 영산강 유역을 아우르는 정치적인 중심지로 지금의 남평에 중앙의 군사조직인 미다부리정을 관할하고 있었다. 경주로 향한 장보고 군은 무진주의 속현인 철야현에서 맞부딪혀 크게 승리하고 경주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장보고는 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딸이 신무왕의 뒤를 이은 문성왕의 왕후가 되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중앙에서는 장보고의 불만을 알고 무진주의 염장을보내 장보고를 살해하고 청해진에 있던 사람들을 김제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청해진을 와해시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