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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7 09:55

영산포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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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포선창
 
리를 건너자마자 이름 그대로 포구로서의 이미지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영산포는 일제에 의해 일인들의 이민이 시작되면서 그 전까지 현재의 택촌과 내영산, 안창동 등에만 살았던 곳을 피하여 현재의 영산동과 이창동 등지에 대규모 개발을 실시하여 본정통을 만들고 헌병분견대를 설치함으로써 조선인을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영산포구 선창을 비롯한 현재의 영산포 모습은 따라서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등대와 영산강변에 자리한 동네와 선창가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최고로 발달했던 포구로서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리고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할 만큼 곳곳에 튼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건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영산포는 모두가 돈벌이를 오는 세칭 잘 나가는 도시며, 많은 배가 영산강을 따라 드나들며 물산과 유행을 전했다.

영산포선창은 1970년대까지 목포로부터 흑산도 홍어와 서남해안의 풍부한 젓갈이 뱃길을 통해 들어오는 집산지가 되었다. 현재도 이곳에는 홍어집이 많이 남아 있어서 영산포는 톡 쏘는 듯한 홍어의 발효된 맛을 전국으로 전파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곳이다.

영산강에 배가 들어온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다. 삼영동 부영아파트 곁의 작은 산에는 영산조창이 있어서 전라도의 세곡미를 모아 강을 통해 목포앞바다로 나가서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양에 당도하는 조운이 조선조 중종때까지 활용되었다. 1970년대까지 배가 드나들며 젓갈, 소금, 생선, 건어물, 잡화, 건축재료가 들어오고 쌀, 잡곡, 가마니, 채소 등이 실려나갔다. 하류에서 올라오면 몽탄나루 - 자구리나루 - 뒤구지나루 - 북적포나루 - 신설포나루 - 사포나루 - 고운진나루 - 중촌포나루 - 터진목나루 - 회진나루 - 동말나루 - 구진나루 - 둥구나루 - 노항나루 - 방목나루 - 천동나루가 큰물구간에 있어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였다. 해방 후에도 20-30톤급의 배들이 물때름 맞춰 오르내렸지만 영산강종합개발이 시행되면서 뱃길은 끊기고 말았다.

원래 나주평야가 영산강의 범람원이었던 까닭에 영산강은 나주평야의 젖줄이자 작은 비에도 강물이 넘쳐 최대의 피해를 입히던 자연요소였다. 이와 같은 대형 재난을 막기 위해 광주댐, 나주댐, 장성댐, 담양댐을 상류에 막음으로써 유수량이 줄어들고 게다가 목포에서는 하구둑을 막아서 조수의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홍수의 피해를 줄였다. 영산강의 홍수는 큰 세 개의 지류가 나주대교 위에서 비로소 하나가 되어 큰 물이 되어 조금만 큰 비가 내려도 유수량이 급속히 증가하고 영산포 아래 앙암바위 부근의 폭이 좁아 상류의 물이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는데다가 조수까지 밀려오면 영산포 새끼내뜰은 범람하여 큰 물이 찌곤 하였던 것이 5개의 댐으로 어느 정도 해소된 셈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유수량이 줄어든 영산강은 광주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흘려보내는 생활하수와 축산폐수, 그리고 공장폐수가 유입되어 전국적으로 가장 오염이 심한 강이 되어버렸고, 하구둑이 막힘으로써 선박운행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