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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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연맹 학살사건
 
 

미군정은 이승만을 후원하고 이승만은 과거 친일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의 기반을 다져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청산해야 할 대상이 다시 정권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일제 말기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거의 전부가 일제에 협력하게 되지만 이를 거부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독립운동가를 색출해내던 친일세력은 이승만 정권과 결합하여 마치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여기고 빨갱이 색출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과거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까지 빨갱이로 내몰리게 되었다.

정부당국은 미군정이나 정부에 저항적인 인사들을 좌익으로 몰아붙이고 이를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무작정 억누를 수 없음을 알고 이들을 전향시킨다는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나주지역의 경우 일제보다 더 악독한 공출을 강요한 미군정에 반발했던 추수봉기에 가담하거나 여순사건때 빨치산에 협조적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가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주의 보도연맹원들은 좌익성향을 가졌다거나 조직적으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행동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이 그러한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이 발발하여 전황이 불리해지자 보도연맹원들을 체포 구금하여 가두었다. 그리고 나주를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 인민군이 나주에 들어오면 이들이 협력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대적일 학살을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립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그러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정당한 재판절차도 없이 즉결로 학살했던 것이 바로 보도연맹 학살의 진실이다.

7월 20일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경찰은 서둘러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서 온수골 야산에서 3백여명을 학살하고 7월 23일 나주를 떴다. 나주 사람들은 좌익성향이든 우익성향을 가진 사람이든 당시의 보도연맹원들이 좌익인사들이거나 공산주의자들은 아니었으며 얼마간 반정부적인 성향을 가졌을 뿐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이후의 피비린내나는 좌우익간 학살극의 서막이었다.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는 인민재판을 통해 군경가족들이 희생되었고, 다시 수복 후에는 군경에 의해 좌익 및 부역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