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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의병장 - "한말의 국권 상실기(1894-1910)" 역사기록 자세히 보기
 
 

 가장 먼저 의병부대를 이끈 사람을 박민수로 금성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의병장 박민수는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서 출생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 문준호·정병균·박양수·박사과·이군보·김원숙·박재홍·임종기·최장홍·김만봉·주영선·이치열·김군보·박양상·김유성·이유석·정서홍·임수돌·임종익·임종철·배좌양·박일서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서 다시면 신걸산을 본거지로 해서 왜군과 싸웠다.
김태원은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갈마지)에서 김노학의 장자로 출생하여 소년시절에 유학을 배웠고 이웃고을까지 장사로서 이름이 났었다. 25세때 전봉준의 척왜척양 보국안민을 외치는 주장에 공감해서 백산기포(白山起包)에 참가하였고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에 일시 귀가하였다가 당시 관속들의 감시를 피하여 한성으로 가다가 수원에서 애국지사 김가락(金河落)을 만나 1896년 봄에 명성왕후를 살해한 일본세력을 몰아내고 단발령을 반대하는 의병 항전에 참여해서 경기의병 창의대장 민승천의 선봉장이 되어 이천·광주·여주·수원·안산·남양 등의 전투에서 가는 곳마다 용명을 떨치다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때 실의를 안고 나주로 돌아왔다.

1905년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오적신에의해서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애국정신에서 구국투쟁에 동참할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7월에 그 아우 김율(金律)과 더불어 나주·광주·함평·영광·장성·무안군에 사는 김돈·조경환·강길환·이덕삼·유병기·양상기·오영모·김찬문·김해 등 수백명의 항일의병을 거느리고 나주·함평·무안·장성·영광등지에서 일본군대와 경찰대 및 그들의 앞잡이가 된 일진회 등 친일세력을 기습공격하는 전투를 벌여 오다가 1907년 9월 장성군 동화면 서양리 석수암에서 호남의병회맹소 기삼연(奇參衍) 대장과 합류하여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문수사로 본진을 옮겨 그곳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장성 법성포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에게 많은 손실을 주었다. 그후 기삼연과 헤어져 독립부대를 이끌고 전라남도의 서남 곳곳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오다 그해 12월 나주 사호(현 광주시 사호동) 전투에서 일본군 이백여명을 사살한 후 설날 전날밤에 조용한 곳에서 새해를 맞기 위해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 들어갔다. 1908년 1월 1일 설날 새벽에 그 마을에 사는 친일밀정의 고발로 청일·러일정쟁에서 용맹이 있던 광주지구수비대장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이 이끄는 일본군들이 이 마을을 포위 공격하여 오자 죽봉은 삼백여명의 적은 병력뿐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긴 돌담장이 많은 지형을 이용해서 잠복해 있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일본부대를 전멸시켰다. 그 다음날 기삼연이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우 율에게 일부 병력을 나누어 주어 화순방면으로 보내고 본인은 기삼연을 광주로 가는 중도에서 탙출시키기 위해 광주 경양방죽까지 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후 장성·영광·나주·고창·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일인들이 있는 병참소등을 계속해서 유격전술로 기습해 오니 일본군은 길전(吉田)부대가 참패된데 복수심을 품고 병력을 더욱 보충해서 죽봉부대를 추격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죽봉은 의병을 일으킨 후 40여회의 크고 작은 승전을 하여 왔지만 이해 늦은 봄이 되면서 전남도내 의병항쟁이 거의 사라겨 가고 죽봉부대만이 두드러지게 남아 있기 때문에 신무기로 무장된 일본군들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 장성 대곡싸움에서 무기와 병력의 열세 때문에 패전하고 광주 어등산에서 일본군 대부대에 포위되어 여러날 동안 악전고투하다가 지병인 요통이 재발되어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죽봉은 부하들을 제각기 살길 찾아 도망치게 한 다음 박산 (광주시 박호동)마을 뒤 큰 바위위에 올라가 적탄에 맞아 3월 25일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고 광주시 농성동에 전남유도회에서 도민의 성금을 모아 동상을 건립하고 함평읍 기산공원과 나주시 남산공원에 충혼비가 있으며 진안군에 영광사(永光祠)가 있고 함평군 나산면 죽림리에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조정인은 서울 만리동에서 태어나 임오군란에 참가했다가 아우 정룡과 함께 고향인 나주 산정동 명당거리로 피신해서 내려왔다. 1907년 12월 김태원의 의병에 들어가 나주·광주·함평·장성 등지에서 항일전을 거듭하다가 1908년 6월 15일 현 광주시 광산구 신촌에서 나주헌병대에 잡혀 1909년 1월 25일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최택현은 나주 다시면 동곡리 동촌에서 태어났다. 종형 광형, 종제 병현, 아들 윤룡과 더불어 의병 20여인을 모집하여 항일전을 벌여 왔다. 1907년 9월 17일 함평군 학교면 석정리에서 영산포헌병분대원과 싸우다가 병기의 열세때무에 패전하여 종형, 종제,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권택은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구례동에서 출생하여 벼슬한 일은 없고 경서를 많이 읽었고, 대담하며 소탈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07년 6월에 기삼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기삼연이 죽은 후, 1908년 5월에 심남일 막하에 들어가 항일전을 계속해 오다가 1909년 9월 25일에 장흥읍 예양리에서 잡혀 죽었다.

박사화는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김태원의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1908년 4월 25일 어등산에서 패전하고 그해 5월 심남일과 합세하여 그 중군장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1월 독립부대를 이끌고 나주를 중심으로 항전하였는데 그해 1월 21일 150여인을 거느리고 나주군 와옥면 월천리 구천동에서 영산포헌병대와 싸우고, 1월 25일 왕곡면 신포리에서 영산포 분견대와 싸우고, 6월 1일 영암군 신북면 이천리에서 50여인이 영산포헌병대와 격전하였다. 6월 11일 반남면에서 의병 70여인과 나주분견대를 공격하고 7월 14일 병력과 무기의 열세 때문에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렵게됨을 판단하여 영산포헌병분대장과 나주군 상곡면에서 회담하고 부하 100여인이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7월 18일~19일에 박사화·김선중 외 15인이 영산포헌병분대에 투항하였다가 박사화는 밤중에 다시 도망쳤고 그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 외 전북 임실군 출신 의병장 전해산은 1907년부터 나주지역에서는 가장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인 분으로 1910년 8월 대구감옥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