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전

  • home
  • 나주역사
  • 해방이전
  •   한말 국권상실기
     나주와 동학농민운동 - "한말의 국권 상실기(1894-1910)" 역사기록 자세히 보기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와 맞서는 과정도 역시 마찬가지다.
삼별초는 강화의 고려정부가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백성의 고통이 심각해지면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몽고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진도로 옮겨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면서 항쟁했던 고려의 자주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부대가 나주에 진격해오자 나주인들은 이를 적으로 인정하고 맞아 싸우게 된다. 그것은 어찌된 이유일까. 우선 나주는 제2대 혜종의 고향이다. 게다가 대대로 중앙권력과 밀착된 상태로 이어온 까닭에 아무리 몽고에 대한 항쟁에 나섰다 하더라도 중앙권력과 반하는 것이라면 이는 나주인들에게는 옳지 않은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구나 삼별초라는 군사집단의 성격을 파악해보면 나주인들에게 삼별초는 결코 옳지 않았다. 우선 삼별초는 최충헌이라는 집권자의 사병적 성격이 강한 데다가, 실제로 대몽 항쟁기간에는 전 국민이 몽고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때 강화도에서 집권 권력자들과 함께 피해 있었던 친위세력이었다. 거의 모든 군사력이 바닥났을 때도 오직 삼별초만은 남아 있어서 몽고의 고려지배에 장애물이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을 해체시키고자 삼별초의 조직과 인명록을 요구하므로 이에 반기를 들고 진도로 내려갔던 것이다. 이런 삼별초에 대하여 나주인들은 호장 정지려를 중심으로 뭉쳐 금성산성에서 맞아 싸워 물리쳤다. 후일 금성산이 정녕공에 작위를 얻게 된 것도 삼별초의 진압에 금성산신의 힘이 컸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동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사대부들은 금안동이나 회진 등에서 살고 있었고 나주읍성내에는 관리와 아전 그리고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사대부와 관리들이 보기에 동학은 혹세무민하는 사교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전라도 53개 고을이 모두 동학에 무릎을 꿇었으나 나주만은 굳게 성을 지켜 동학농민군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시기에도 동학에 성을 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배후에서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 시기에 나주에는 동학을 진압하게 될 초토영이 설치되었고, 나주목사 민종렬을 위시한 유림과 관리들은 끝까지 성을 지켜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전라우영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하여 최경선 등 동학 지도자들이 모두 잡혀와 처형되었고, 전봉준만 한양으로 압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