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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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면서 나주지역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어온 방수군(防戍軍)인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속하게 되고 북쪽에서는 궁예가 고려(후고구려, 태봉, 마진)를 세워 후삼국으로 다시 정립된다. 나주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해 전비 마련에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느슨해진 통제를 틈타 바다를 통해 들어온 송악의 왕건과 손을 잡게 된다. 

왕건이 나주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몇 가지 측면에서 후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우선 첫째로 후삼국의 쟁패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후백제를 위 아래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취해 위협했다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승리의 요인이었다. 둘째로 광대한 나주평야의 양곡을 획득함으로써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에게 안정을 되찾게 해주고 또한 풍부한 군량미로 인한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어 또 다른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왕건 개인으로서는 궁예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됨으로써 훗날 유금필, 배현경, 박술희 등이 앞장선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또한 나주에서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 2대왕인 혜종을 얻게 된다. 

나주는 왕건으로 인해 금성군에서 나주라는 이름을 얻는다. 당시 상황으로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무진주를 두고 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동안 무진주 중심의 지방편제에서 나주중심의 지방편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특히 왕위에 등극한 직후인 918년 9월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를 설치하고 전 광평성 시중 구진(具鎭)을 나주도대행대 시중으로 임명하여 파견한다. 나주도대행대란 고려의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나주를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특별기구였다. 이처럼 나주를 특별구역으로하고 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직명을 중앙의 최고관직인 시중이라 칭했던 것이나 그 자리에 광평성의 시중을 파견했던 것 등은 나주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견훤은 왕위 계승문제로 아들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 맏아들 신검에 의해 김제 금산사로 유폐되었고, 결국 금산사를 빠져나와 나주로 탈출하여 송악의 왕건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로써 후삼국은 외세의 개입없이 순수하게 옛삼한의 땅에서 일어난 힘, 우리 민족에 의해 통일되었다.

고려는 성종 2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12목을 정할 때 나주, 전주, 승주에 목(牧)을 설치하였고, 현종 9년 전국을 8목으로 조정할 때 전주와 승주는 제외시키고 나주만 호남 유일의 목으로 남게 하였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했던 것도 역시 고려왕실과 나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친후백제 노선을 견지했던 무진주는 통일신라시대 지방 편제의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양현(海洋縣)으로 강등하여 나주목을 중심으로 한 지방 편제를 확고히 하였다.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중심은 목이었다. 도 단위에 해당하는 안찰사는 감찰업무만 수행하였고 반면 도 단위의 항상적인 지휘업무는 목의 계수관의 몫이었다. 따라서 나주목은 전남지역 군현에 대한 감독업무를 수행하는 중심치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주목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5개의 속군과 11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고, 지방관이 파견된 1부, 4군 4현의 영군현을 지휘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