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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량동 옹광가마터
 
 2001년에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옹관묘에 사용된 대형 전용옹관 가마터가 나주시 오량동에서 발굴되어 또 다른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형 옹관(甕棺)고분들이 강력한 세력을 가진 고대국가를 형성했다는 반증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옹관의 주인과 제작방법에 많은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옹관 가마터가 한 곳에 집중된 상태로 1천5백여년이 지나 나주시 오량동에서 발견되어, 호남지역 고대사회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줄 열쇠로 학계 안팎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그 동안 고고학계는 옹관을 구운 가마는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었다. 따라서 오량동 가마터는 한국고대문화사를 새로 쓰는 결정적인 단서가 됨을 의미한다.

옹관은 옹기와 같은 성질을 가진 동일시대의 생활용기로 점토와 제작방식 등에 있어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크고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묻는 일종의 관으로써 용도가 한정돼 있어서 제작방식과 유통에 많은 의문점을 지녔다. 길이가 1.5~2m에 이르고, 무게가 100㎏ 내외로 대형이어서 화도(火度)를 맞춰 일반 옹기처럼 가마에 넣어 굽기가 불가능할 것이란 점 때문에 옹관의 제작과정은 지금까지 수수께끼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학계는 그 동안 고분에서 출토된 옹관들은 장례시 무덤 옆에서 구덩이를 파고 흙을 쌓은 임시가마에서 만들어 관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 때문에 수많은 옹관의 출토에도 불구하고 옹관을 만든 가마 등의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집단 가마터 발견으로 이러한 주장은 낭설이 되버렸다. 대형옹관을 직접 구워낸 대규모 가마터가 집적된 유적이 확임됨으로써 옹관을 한 지역에 토굴형 가마를 짓고 옹기처럼 구워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근 영산강 수계를 따라 분포한 옹관고분지역의 수요에 따라 대량생산을 통해 분배, 공급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가마의 성격뿐만 아니라 점토채취와 옹관을 빚은 공방터, 운송로인 나룻터 등도 인근에 묻혀 있을 가능성도 높아 옹관제작과정과 영산강 수로를 통한 유통경로까지 새롭게 드러날 경우 당시의 지배세력의 상업생산 및 경제활동 범위와 내용도 추정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백제다, 마한이다, 또는 전혀 다른 고대국가 세력이다"는 등 옹관묘의 주인을 놓고 쌓인 고대정치세력의 실체규명에도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더불어 문화재 당국의 학술조사가 이뤄지면 이 같은 옹관을 둘러싼 고대사회의 풍습과 세력형성, 경제활동 등의 의문점을 풀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특히 오량동 가마터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복암리 고분과 직선거리로 2㎞에 인접해 있고 양지역 옹관이 시기와 제작방법, 문양, 제작자가 동일한 것으로 확인돼 4~5세기 호남 서남부지방의 고대사회의 베일을 벗겨줄 결정적 유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나주 오량동 옹관가마터 발견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계는 물론 문화재 당국도 깜작 놀라고 말았다. 우리나라 고대사의 한 축을 형성한 호남권의 묻혀진 역사를 밝혀줄 실마리가 마침내 나왔다는 환호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나주 복암리고분의 주인으로 알려진 영산강권역 지배세력에 대한 의문이 풀릴 중요한 유적이다"면서 "이 정도라면 국가사적지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한발 앞서 나갔을 정도다.

최성락 목포대박물관장은 "이번 기초조사를 토대로 나주시와 문화재청이 예산을 책정해 고대사회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학술조사연구와 보존대책을 병행해야한다"면서 "집단적으로 조성된 가마터의 보존상태가 양호해 국가사적지 지정이 충분하고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유적의 최초 발견자인 박철원 동신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남도로부터 사적지로 가지정 받아 현장을 보존하고 성격을 파악한 다음 국가사적지로 지정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사적지 지정은 기초조사를 실시한 지역뿐만 아니라 인근 구릉지 3곳 모두를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옹기를 굽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흙과 불을 관리하는 능력은 1천5백여 년 전의 지배세력에겐 통치권의 기반이 되기에 충분했다. 옹기나 옹관 등을 굽기 위해 가마를 짓고 불을 때는 기술은 당시의 산업 생산 활동으로선 최고의 수준으로써 지금으로 치면 최첨단산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발굴팀의 추정으로는 나주 오량동 옹관 가마터는 4~5세기 호남지방 지배세력이 운영하던 관요(官窯)로 산업생산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가마의 규모가 길이 9m, 너비 2.2~2.5m, 깊이 75㎝에 이르는 대형 가마로서 복암리고분과 영산강변 인근 구릉지에 밀집 조성돼 「옹관가마단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초조사를 실시한 7만여 평의 발굴지 외에도 맞은 편 능선 2만여 평의 구릉지에서도 가마터 흔적이 추가로 나타났다. 또 현재 농공단지가 들어선 뒷쪽 묘역 인근 1만5천여 평 언덕배기에서도 역시 동일한 집단 가마터 흔적이 엿보여 오량동 일대가 영산강 수로와 연결된 생산과 운송의 지리적 조건을 완비한 대규모 가마촌을 형성, 당시의 「최첨단 산업단지」였다는게 학계의 주장이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옹관뿐만 아니라 옹기 등의 도기파편도 함께 출토돼 다양한 생활용기 생산의 집적단지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발굴이 계속될 경우 점토채취장을 비롯하여 공방터, 재료 가공터, 다양한 종류의 가마, 옹관 및 옹기의 창고, 운송 나룻터, 도공들의 거주지 등 체계적인 분업화 현장의 형태를 틀림없이 갖춘 산업생산의 전진기지가 드러날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오량동 옹관 가마터는 완만한 구릉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토굴을 파고 들어가는 터널식으로 통풍과 배수 등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2개 정도의 옹관이 들어갈 소성실과 불을 때는 연소실 및 배수로 등을 안쪽과 입구 쪽으로 구분해 과학적 방식으로 설치됐다. 연소실 쪽엔 장작불 땐 숯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고 입구 양편에 기둥을 세워 작업공간을 확보한 흔적도 보인다. 특히 각 가마들은 수차례 반복 사용한 후 폐기한 다음 다시 안쪽으로 더 파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한 장소에서 두 세 번의 가마를 새로 지어 장기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구운 옹관은 가마불 온도가 800~1천도로 1천200 내외의 경질토기나 그 이상인 청자·백자 등 보다 낮아 불을 다루기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또 풍향과 계절, 나무, 점토 등에 따라 불의 성질이 달라 당시 도공들은 옹관 빚는 솜씨와 불 다루는 기술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2000년에 실시한 옹관제작실험 결과 1m짜리 옹관은 성공했지만 1.5m 이상의 대형옹관은 허물어져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지금도 옹관굽기의 기술은 수수께끼에 가깝다.

다만 나주 지역 곳곳에 산재한 옹관편을 볼 때 지금 옹기를 성형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이 보이고 있다. 흙을 지금처럼 곱게 빻아서 반죽했던 것이 아니라 모래가 드문드문 섞인 거친 흙을 사용했으며 여기에 탄화물 즉 재를 섞어서 반죽함으로써 두꺼운 옹기를 구울 때 터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그 무게 역시 크게 줄인 것으로 여겨진다.

복암리고분의 주인공이었던 당시의 지배세력이 영산강 인근의 나주와 영암, 함평, 영광, 해남 등지에 옹관을 배분·판매하는 강력한 경제권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오량동 가마단지는 그 지배력의 원동력이 됐던 첨단산업단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