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관고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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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암리 고분군
 
 최근에 복암리 3호분이 발굴됨으로써 나주지방뿐만 아니라 전남지방 전체의 고분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은 최근까지 안동권씨의 선산으로 관리되어 전혀 도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다행스러운 경우였다.

복암리 3호분에서는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의 진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증거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전까지는 옹관묘와 석실분이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발굴되었다. 그것이 시대적인 차이를 두고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백제계의 석실분과는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토착세력의 석실분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암리 3호분에서는 석실분 내에서 옹관이 발굴됨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대두되었다.

이 고분은 한 분구 내에서 옹관묘, 수혈식 석곽묘, 횡혈식 식곽묘, 횡구식 석곽묘, 석곽옹관묘, 목관묘 등 그 동안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었던 모든 유형의 묘제가 망라된 41기(분구 조영 후 무덤 수는 28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묘제가 복합된 고분은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고대 영산강 유역 묘제의 다장 및 복합묘적 성격 연구의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고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흔히 1인을 위한 대형고분이 나타나는 신라나 백제의 예와 비교하여 다장이면서도 고총화된 고분을 조영한 이 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층위 관계와 유구의 중복관계를 통해 복암리 3호분의 변천과정을 잘 파악할 수 있는데, 방대형분구의 선행기인 옹관 전용기와 ’96석실묘, 수혈식석곽묘, 1·2호 석실묘가 조영된 방대형 분구 조형기(Ⅰ기), 방대형 분구 조영 이후 성토층을 파고 만든 석실분 성행기(Ⅱ기)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옹관묘는 Ⅱ기의 이른 시기까지 사용되어 옹관묘의 하한 연대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게 되었고, 기존의 옹관묘 조성 세력과 동일한 집단으로 여겨지는 3호분 석실묘 피장자 집단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영산강 유역과 백제와의 관계에 대하여 신중한 재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복암리 3호분의 조영 기간은 방대형 분구 선행기의 옹관 중에는 영산강 유역 전용옹관 중에서 이른 시기(3세기경)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횡혈식 석실묘 중에는 7세기 전반까지 내려오는 것이 있어 전체적으로 400여 년 동안으로 방대형분구는 5세기 후엽부터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96석실묘와 제5·7호 석실묘와 그 부장유물이 복암리 3호분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96석실묘의 금동신발과 은장삼엽환두도, 제5·7호 석실의 관모·규두대도, 5호 석실의 은제관식 등은 주목되는 유물이다. 이 가운데 은제관식과 관모는 백제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로 볼 수 있으며, 규두대도는 일본 고분 시대 말기인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반에 주로 출토되고 있어 양 지역간의 관계규명에도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산강 유역의 토착묘제인 옹관묘와 외래계인 석실분의 융합 및 대체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옹관 자체의 변화과정, 금동신발 등을 부장할 대형석실분, 지역 자체 발생적인 것으로 보이는 석실분, 백제 석실분의 도입 등은 묘제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