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관고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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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남고분군
 
 고분은 옛날에 만들어진 무덤을 뜻하는 말로 역사적인 혹은 고고학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말한다. 3-4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고대국가로서 체제를 확립하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거대한 분묘를 축조하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적석총,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가야의 횡혈식석곽분(橫穴式石槨墳) 등이 축조되는데, 영산강유역에서는 거대한 옹관을 매장한 옹관고분이 만들어진다. 고분이 역사적 혹은 고고학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매장방법을 통하여 그 시대의 제도, 풍습, 신앙 등을 파악할 수 있고, 또한 죽은 자를 위하여 마련한 부장품을 통하여 그 시대의 문화, 미술, 공예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남지방의 옹관묘는 철기시대 초기인 기원전 1세기경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소형의 옹관묘로 일부지역에서만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대형옹관묘가 나타나는 것은 기원후 3세기 후반경이다. 옹관은 2개의 옹기를 마주한 합구식으로 그 크기가 단옹의 경우는 100-200cm, 합구할 경우 200-310cm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 옹관이며, 부장품으로는 대부분 토기류, 철기류, 구슬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옹관고분은 다른 지역과는 판이한 무덤 양식이며, 그 규모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주지역의 옹관고분은 일제강점기에 일인에 의해 반남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고분군이 조사되어 대형 옹관묘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환두대도, 귀고리, 팔찌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관은 기본적으로 신라관과 동일계통의 것으로 보이나 신라관의 도식화된 출자형(出字形)과는 달리 초화형입식(草花形立飾)으로 구성되어 있어 형식상 古式에 속한다. 이에 따라 신라와 관련을 짓거나 백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등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어쨌든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은 같은 시기의 금관 가운데 외관과 내관인 관모가 완벽하게 갖춰진 것으로 같이 출토된 금동신발과 함께 이 지역에 왕을 칭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존재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반남 고분군에 대한 첫조사는 일제의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의 특별조사사업으로 이루어졌다. "大正6년도 조선고적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원 다니이 사이이찌(谷井濟一)와 제도사, 사진사 2인이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눈이 계속 내리는 악천후 속이었던 관계로 다음 해에 조사를 속개하였다.

한 페이지에 불과한 이 보고서는 간단하게 조사내용을 개설하였으나 마차 11대에 실릴 정도로 많은 유물을 실어갔으며, 이 지역 고분에 대한 첫 시각을 여는 계기가 되었고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족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고분이 도굴 등의 수난을 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다니이 사이이찌의 보고서 전문이다.
「반남면에 있는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및 대안리의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의 외형은 원형 또는 방대형이며 봉토내에 1개 또는 수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결과를 개설하면 먼저 지반상에 성토를 하고 위에 도제의 큰 독을 가로 놓은 뒤, 이에 성장한 사체를 오늘날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布)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 쪽부터 큰 독 속에 끼워 넣고 큰 독의 아가리에서 낮거나 또는 아가리를 깨서 낮게 한 작은 단지(小土甘)를 가지고 판자를 아래로부터 받친 뒤 약간 작은 독을 큰 독 속에 끼워 넣어서 사체의 족부를 덮고 대소의 독이 맞닿은 곳을 점토로 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그 발견된 유물 속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있고, 칼(大刀 및 刀子)과 도끼, 창, 화살, 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 관옥, 다면옥(切子玉), 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과 관계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도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考說은 후일 『나주 반남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 제하여 특별보고로서 제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특별보고를 제출하겠다고 했던 다니이는 어떠한 보고서도 공식적으로 제출하지 않았으며 제출하지 않은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국내 학자들은 조사된 내용이 "아마도 왜인의 유적일 것이다"는 내용에 맞추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였다. 이후 1938년 有光敎一과 澤俊一이 신촌리 6·7호분, 덕산리 2·3·5호분 등 옹관고분 5기와 흥덕리 석실분을 발굴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의 횡액으로 훼손되어 봉토가 완전한 예는 거의 없고 신촌리 6호분에서만 2개의 옹관이 원상태대로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은 나주 지역에 왕이나 혹은 이에 준하는 정치지도자의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으나 어떠한 정치적 체제를 지니고 있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이에 대하여 서울대학교 최몽룡 교수는 마한 제국의 맹주국인 목지국의 최후 근거지를 지금까지의 목지국의 변천과정을 다룬 가설과 비교하여 나주지역이 가장 타당하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