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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6 15:20

안창동 제창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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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동 제창마을 지신당과 사당산제
 
 창마을은 옛 국도 1호선을 따라 가면 영산포 삼거리에서 구진포 쪽으로 약 1/3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제창이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조 정조때 홍봉한이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세운 제민창이 있었던 데서 생긴 이름이다. 당시 호남 좌창은 순천에 우창은 현재의 제창마을에 세워졌다. 제민창은 호남지방곡물의 5만석중 이만석을 보관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다. 대신 제창마을에 정부양곡창고가 자리하고 있어 옛날을 되새기게 한다. 가까운 택촌마을에는 영산창이 있던 자리로 영산포는 조창 및 제창이 있던 자리여서 국가 경제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제창마을 뒷산은 북쪽에서 뻗어 내린 별봉산(해발168m)으로 이 마을의 가장 큰 건물은 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미수 허목을 모신 미천서원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이 마을 앞으로 영산강의 뱃길과 국도 1호선, 호남선 철로가 지나갔으나 하구둑이 축조된 뒤로 배가 끊기고, 국도 1호선은 다시면에서 보산동, 교동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도로로 바뀌었고, 철로는 마을 앞에서 뒷산을 터널로 통과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을 이름은 1789년 호구총수에 ‘羅州牧 新村面 濟倉村’으로,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倉村으로 바뀌어 나타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도 창촌의 지명으로 나주면 안창리에 속하였으며, 1929년 나주면에, 1931년 나주읍에 차례로 편입되었다.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 금성시로 승격됨에 따라 영강동의 관할이 되었고, 1986년 나주시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총 62가구 166명(남 76, 여 90)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경지규모가 미약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 지신당과 사당산제
 제창마을에서 지내는 지신당제와 사당산제는 특별한 형태의 당제로 알려져 있다. 지신당의 신격은 당산할아버지이고, 사당산의 신격은 당산할머니이다. 당산할아버지는 본당이라 불리우는 당집에 모셔져 있는데, 당집은 마을의 북동쪽에 위치한 기와집이다. 이 기와집은 정면 1칸, 측면 1칸에 앞에는 퇴주를 둔 맞배 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다. 당집 안에는 당할아버지 영정과 제물을 운반할 때 쓰이는 도구와 제기들이 있다. 사당산은 모두 당산나무로 ‘웃당산’,‘앞당산’,‘솔당산’,‘큰당산’이라 불리우며, 귀목나무와 팽나무로 마을의 동쪽 도로 맞은 편, 마을의 중심부인 마을회관 옆, 서쪽인 미천서원 옆, 그리고 당집 앞에 있다.

지신당제와 사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10일 밤 6시부터 12시까지 지낸다.
제관은 음력 1월 3일에 선정한다. 부정이 없고 행실이 바른 사람들 중 제관 5명?축관 1명?도유사 1명이 선정된다. 제관 5명 중 1명은 지신당제관이고, 나머지 4명은 사당산제관이다. 도유사는 제물을 장만하고 제를 총 주관하는 역할을 맡는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제일 5일 전부터 부정한 곳을 피하고 또한 음식도 가려 비린내나는 음식을 먹지 않는 등 금기를 철저히 지키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금기를 지키지 않고 정성을 드리지 않아 큰 화를 당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40여 년 전 제관으로 선정되었던 김아무 씨는 제에 올릴 돼지를 잡다가 돼지 콩팥을 먹고 입이 삐뚤어졌다. 이에 놀란 제관들이 다시 제물을 사다가 제를 준비한 후 잘못을 빌자 그때서야 다시 본래의 상태로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마을사람들도 엄격하게 금기를 지킨다. 당제 기간 중 빨래도 안되고 출산을 하려면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가축이 새끼를 낳을 때에도 외지로 데리고 나가거나 축사 주위에 금줄을 쳐 사람의 출입을 금해야 한다.

제일 하루 전 도유사는 나주시장이나 영산포장에서 제물을 구입한다. 구입하는 것은 톳, 미나리, 팥, 건포, 밤, 대추, 곶감, 명태 등 제물과 제에 쓰일 석작, 그릇 등의 비품이다. 마을에 남아 있는 제관들은 제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대나무 20여 개를 준비하여 제장 주위에 꽂고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깐다.

제일 아침 제관들은 구입한 돼지를 잡는다. 그런데 흰 점이 있는 돼지는 부정하다 하여 완전무결한 검은색 돼지를 구입하여 제물로 사용한다. 만약 제관이 지정한 집에서 돼지를 팔지 않을 경우에는 堂神의 노여움으로 그 돼지가 죽어버린다는 속설도 전해지고 있다.

제관들은 흰색의 한복을 입고 제물을 조리하는데 대부분의 제물은 익히지 않고 생으로 올리며, 단 메와 돼지고기만 익혀서 올린다. 메에는 잡귀와 부정을 막기 위해 팥을 뿌린다.

당제에 소요되는 비용은 예전에는 제답이 있어 충당하였으나, 현재에는 마을공동자금에서 지출하고 있는데, 30에서 40만원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제를 지내면서 마을 풍물패가 풍물을 치면서 진행하였으나, 현재는 인원의 감소로 풍물패가 준비되지 않는다. 대신 2001년의 경우 마을 청년 중 한 명이 조선대학교 풍물패에 소속되어 있어 조선대학교 풍물패 5명이 동원되어 제의 진행을 도와주었다.

오후 6시가 되면 제관들은 풍물패를 앞세우고 마을회관을 나와 지신당으로 향한다. 이때 4명의 제관이 가마를 들고 가는데, 가마 위에는 지신당에 진설할 제물이 놓여 있다. 지신당에 도착하여 제물을 진설할 동안 풍물패는 당집 앞에서 풍물을 친다.

지신당에서 진설이 끝나면 제관들과 풍물패는 네 곳의 당산을 돌며 풍물을 친다. 사당산에서의 풍물은 각 경마다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휴식은 마을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회관에서 취한다.
마을회관은 마을의 중심부라 하여 제물로 쓰일 돼지를 잡고 돼지머리와 시루, 그리고 술 1잔을 차려놓는다. 이러한 진설은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의 성주상과 비슷하다.

밤 9시경이 되면 풍물을 시작으로 지신당제를 지낸다. 지신당제는 진설 - 헌작 - 초헌 - 아헌 - 종헌 - 재배 - 독축 - 소지 - 헌식 - 철상 순으로 진행된다. 지신당제가 진행되는 동안 당집 밖에서 마을사람들은 제의 진행을 구경하기도 한다.

소지는 각 가정 호주의 이름으로 올리며 찬조금을 낸 집은 가족수대로 올린다. 소지가 제대로 올라가면 그해에는 별탈 없이 지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한다.

지신당제가 끝나면 도유사가 사당산 제관들에게 제물을 분배한다. 4명의 제관들은 각기 석작에 백지를 깔고 메 1그릇·시루떡·술·돼지고기·명태 1마리·밤·대추·곶감 등을 담은 후 자기가 맡은 제장으로 가 당산제를 지낸다.

사당산에서의 당산제는 진설 - 헌작 - 재배 - 소지 - 음복 - 헌식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올리고 싶은 대로 올리는데 먼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제관 개인과 가정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헌식은 메와 곶감·밤을 당산나무 아래에 묻는 것을 말한다. 이외 제물은 제관이 집으로 가지고 간다.
이후 제관들은 다시 지신당으로 돌아와 각 경마다 한번씩 당산을 순찰하며 5경이 지나면 제를 모두 끝마친다. 제를 지낸 다음날 마을총회를 개최하여 함께 음복을 하고 제의 결산을 한다.
 
2. 지신당에 대하여
 당산할아버지가 모셔진 당집은 폭우로 붕괴되어 1989년 7월 정부보조금으로 중수하였다. 당집 상량문에는 1930년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전부터 건물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당집을 두고 마을사람들은 지신당제를 모시는 본당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일부 학자들은 龍津壇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주시마을유래지"를 보면 “용진단(龍津壇)은 마을 남쪽에 있는 앙암바위 밑 구멍에 사는 용왕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고려때부터 나주목사가 제단을 설치해 놓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한해에는 기우제를 지냈다. 또 영산강을 따라 흑산도·제주도로 건너가고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배들이 모두 사고가 없게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용진단의 위치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과 [나주읍지]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미천서원의 동편에 있는 마을의 지신당의 당집이 바로 용진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