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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6 15:14

금성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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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험한 금성산신께 올리는 금성당제(錦城堂祭)
 
 려 때 전국 7대 명산이었던 금성산에는 5곳의 사당이 있었다. 산꼭대기에 상실사(上室祠), 산허리에 중실사(中室祠), 산기슭에 하실사(下室祠)와 국제사(國祭祠)가 있었고 성안에 이조당(爾朝堂)이 있었다. 이 금성산에 신이 내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 금성당제이다.

그 유래는 이렇다. 고려 충렬왕 4년(1278) 금성산사의 신이 무당에게 내려 “진도와 탐라의 정벌에 나의 힘이 컸는데 장병들은 모두 상을 주고 나만 빠졌으니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주출신 보문각대제인 정가신이 왕에게 작위를 주도록 청하고 매년 나주의 녹미 중 5석을 사당에 주어 춘추로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 금성당제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금성산신제였을 테지만 국가에서 이를 유교적인 제의의 테두리 안으로 흡수하여 관리하면서 신당을 짓고 이를 금성당(錦城堂)이라 하고, 국가에서 지내는 제를 금성당제라 하였다.

금성당제는 조선시대에도 국왕이 향·축·폐백을 내리는 국가제사(國家祭祀)였으며, 금성산의 신이 영험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을 내린다 하여 매년 봄·가을이면 나주뿐 아니라 전국팔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해의 풍년과 태평함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남녀를 구별치 않고 노숙하여 염문이 일어나고 풍속을 파괴하는 일이 있어 조정에서 이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금성당제는 규모가 점차 축소된채 일제강점기까지 존속되었다. 그러나 과학사상의 보급에 따라 미신이라 몰려 천시받으면서 금성당제는 그 맥을 잇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금성산과 관련해 전해오는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의 전설을 보면 “토산본향당의 당신인 뱀이 나주 금성산에서 살다가 옥바둑·금바둑으로 변하여 제주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성산의 산신이 뱀이었을지 모른다. 5곳의 사당 중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곳이 이조당인데 당이 있던 곳을 지금도 ‘명당거리’라 부른다. 그곳을 기억하는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은 한 평 남짓한 건물로 하얗고 반질반질한 돌이 신체로 놓여 있었다 하며, 어릴적 그곳은 무서운 곳이라 하여 어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