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명수

영산강

  • home
  • 명산/명수
  • 영산강

29.jpg


산강은 호남정맥의 서편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호남정맥은 백두대간의 남쪽 전라북도 장수 영취산에서 갈라져서 남북으로 뻗은 멧발이다. 영산강의 북쪽 울타리는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룬 입암과 갈재(蘆嶺)에서 불갑산으로 치달리는 영산북기맥이고, 남쪽으로는 탐진강과 섬진강의 샛강인 보성강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삼계봉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영산남기맥에 기대고 있다.


영산(榮山江)의 명칭은 여러 시대와 기록을 통해수많은 이름이 통용되어 왔다.『세종실록지리지』와『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면 나주 동쪽에 흐르는 강을 광탄강(廣灘江)이라 했고, 영산포 부근에서는 남포강(南浦江), 금강(錦江), 목포강(木浦江)이라 했으며 강폭이 넓어져 양양한 흐름을 보여주는 동강면에서는 사호강(沙湖江), 더 아래로 내려가 심하게 곡류하는 곳에 이르면 곡강(曲江)이라 불렀다.
오늘날과 같이 영산강이라는 이름은 영산포의 형성과 관계가 깊다.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흑산도와 영산도 사람들이 나주 남쪽 남포강가로 옮겨와서 살았다. 그들이 속한 곳이 영산현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옮겨 살았던 곳에 치소도 함께 옮겨와 영산현이라 하였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곳을 지금도 ‘내영산(內營山)’마을로 부르고 있다. 영산현은 고려 공민왕 12년에 영산군으로 승격하였으나 조선시대 초 행정구역의 통폐합때 나주목에 폐합되었다. 영산군은 사라졌으나 이후 영산조창이 설치되어 호남 17개 고을의 세곡이 모여들어 창성을 설치하고 여기에서 중앙으로 세곡선으로 한양에 보냈으니 가장 중요한 국가 시설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영산창 앞을 흐르는 강을 영산강 또는 영강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다른 어떤 설화나 전설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은 황룡강쪽으로 담양 병풍산 북녘에서 발원하고 극락강쪽으로는 담양군 용면 용추산에서 발원하고, 지석강은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남쪽 천리난골에서 발원한다. 영산강의 발원지는 유로의 길이로 보면 황룡강이 가장 길지만 학자들은 그 유역면적과 유량, 유역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여 극락강을 본류로 결정함으로써 담양군 용면 용추산 가막골로 발원지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산강은 장성쪽으로 내려오는 황룡강, 광주를 거쳐서 내려오는 극락강, 화순과 남평을 거쳐 내려오는 지석강이 금천면에서 만나 본류가 된다. 강 줄기가 만나는 곳은 전국 어디나 그 이름이 광탄(廣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곳은 공통적으로 넓은 들판을 이룬다. 황룡강과 극락강이 만나는 서창뜰도 넓은 들판이라 광주비행장이 들어서 있고, 그 강이 더 내려와 지석강과 만나는 지점인 금천면의 광탄 역시 넓을 들을 형성하고 있어 옛날에는 군사들의 훈련장이 있었다 한다. 예전 같으면 광탄으로부터 영산강은 더욱 넓은 강폭으로 양양하게 흘렀을 것이지만, 이제 상류의 장성호, 담양호, 광주호, 나주호 등 4개의 인공호수가 들어서면서 다시면 구진포에 이르기까지 좁은 여울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구진포에서부터는 흐름이 느려지면서 생태학상 강이라기보다는 호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영산강은 아직 드넓은 나주평야 곳곳을 적시면서 오늘도 흐르고 있다.
영산강은 황룡강가 극락강, 지석강의 큰물줄기를 비롯하여 1천3백45개의 샛강이 나뭇가지모양을 이루고 있고 총 연장유로는 2천7백40킬로미터에 달한다.

경위도상으로 영산강의 동쪽은 담양군 무정면 동강리 동쪽 봉래산(동경 126˚06’05” 북위 35˚16’00”), 서쪽은 목포 옥암동 부주산(동경 126˚26’31” 북위 35˚48’40”), 남쪽은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 흑석산(동경 126˚38’36” 북위 34˚40’16”), 북쪽은 장성국 북하면 신성리 입암산(동경 126˚49’20” 북위 35˚29’02”)에 있다. 동서로는 61.3km, 남북으로는 89.7km 안에 있으며, 유역면적은 광주시와 전라남도 2시 6군에 걸쳐 3천4백29㎢로 광주를 포함한 전라남도의 30%쯤을 차지하고 있다.

영산강은 나주평야의 젖줄을 이루는 물줄기다. 영산강 유역의 나주평야는 대부분 깎이고 닳아서 생긴 침식평야로 그 한복판에 나주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때 발라(發羅)로 불렀는데, 이는 벌판, 들판이라는 의미를 한자로 옮기면서 생긴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나주평야는 영산강의 범람원이 그 대부분이다.

814년부터 1927년까지 큰 홍수만 32회가 기록되어 있고, 광복 이후에도 1974년과 1989년의 대홍수가 가장 큰 피해를 기록하였다. 나주가 이처럼 홍수 피해를 크게 입은 것은 영산포 아래 앙암바위 부근의 강폭이 좁아 병목현상을 초래하고 상류쪽의 모든 샛강이 한꺼번에 물을 쏟아내는데다가 조수가 광탄까지 영향을 미치면 새끼내뜰은 곧바로 바다가 되어버린다. 소설가 박화성의 단편 ‘홍수전후’는 이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1989년 이전까지는 적어도 수년에 1회씩은 넓은 강둑 양쪽까지 물이 차는 홍수가 있었으며 이러한 홍수는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나주평야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고 수질오염과 하상오염물질 제거에도 큰 기여를 해왔다. 게다가 광탄까지 올라오는 조수는 영산수로의 이용을 가능케 하였으며 고기가 많아 강을 생활터전으로 사는 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나주호, 장성호, 담양호, 광주호가 형성되고 하구둑으로 인해 영산강은 갈수기에 보면 광주지역의 생활하수와 공장지역의 폐수 유입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4대호가 생기기 이전 나주대교 아래에서 조개를 잡고 미역감던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영산강은 홍수방지와 경지마련을 위해 여러 곡류지역이 인공적으로 절단되고 직강공사에 의해 새 제방이 마련되었다. 본류와 만나는 지석천 하류 지역, 송월동 새월마을 앞, 다시면 신석리 앞, 본류와 만나는 고막원천 하류 지역, 삼포강 유역 등은 일제 말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직강공사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특히 나주시청 앞에 위치한 둥구나루는 1985년 직강공사에 의해 사라졌는데,『고려사』열전 장화왕후조에 나오는 목포의 현 위치로 알려져 있다. 둥구나루 자리는 1985년도 직강공사로 습지가 되어 공설운동장 부지로 예정되어 있다가 2001년 나주역과 영산포역을 통합한 나주역사가 들어서 있다. 또한 왕곡면 송죽리의 재창나루 역시 직강공사로 인해 인공호수로 변해 있다.

영산강은 1977년 10월 마지막배가 떠난 이후로 수운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이전까지는 일제 강점기에는 40톤급의 기선이 다녔으며, 해방 후에도 20-30톤급의 발동기선이 소금과 황시리젓 등을 싣고 들어왔다. 이로 인해 영산포는 홍어와 젓갈의 집산지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