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명수

금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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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추월산에서 빗재로 내려오다가 장성 삼계면 고성산, 깃재, 태청산을 거쳐 함평군 월야면 월악산으로 내려와 광산구 대산동 대봉, 망산, 옥산을 거쳐 온 힘을 다해 금성산으로 쳐든 용맥은 남쪽으로 내려와 영산강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

나주 서북쪽 능선을 구성하고 있는 금성산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 있다고 소문난 산으로 그 품안에 호남 3대명촌의 하나인 금안동(金鞍洞)을 안고 있다.

금안동을 품고 있는 금성산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들과 관계있는 산이다. 고려시대 이후로 전국 8명산 혹은 11명산에 속하는 금성산은 산 정상에 금성산성이 있어서 견훤과 왕건의 싸움터로, 삼별초의 나주공략에 대한 나주의 수성싸움과 큰 관계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금성산과 금성산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체찰사 이항복이 이르기를, ‘금성산성은 서·남·북 삼면은 험준하고 동문 밖의 일면만 넓고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는 곳이다. 성중에 우물이 다섯이 있는데, 동문과 대곡에 있는 두 우물이 가장 크다. 봉우리는 4개가 있는데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봉이다. 정녕봉이 주봉이고 동·서·남의 세 봉우리가 앞에서 쳐다보고 있어서 손짓과 몸짓으로 서로 호응하며 말소리도 서로 알아들을 수 있다. 동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의 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서 골을 이루는데 군병을 숨겨둘 만하다. 어떤 이는 샘과 우물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성을 쌓을 때는 인부 5천명이 동문에 있는 우물 한 곳의 물을 마셨는데도 끝내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금성산은 나주를 지키는 진산으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얻지 못하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한국사에서 대단히 큰 사건으로 평가되는 일이다. 나주를 얻은 왕건, 나주를 점령하지 못한 삼별초, 전주를 포함하여 호남 53개고을을 점령하고도 나주읍성내에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하고 수성군에게 패배한 동학농민군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고려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에서 장화왕후 오씨의 만남을 다소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태조 왕건이 나주 목포(木浦, 목포는 지금 나주시 송월동 새월마을 나주역사 위치에 있던 포구라는 것이 정설임, 목포는 지명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 배를 댈 수 있게 한 포구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일 수도 있음)에 내려 상류를 보니 오색구름이 머물러 있어 가보니 아리따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어서 가까이 하여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제2대 왕이 된 혜종이다. 왕건은 바다를 통해 수군을 이끌고 영산강을 통해 나주에 이르러 나주 호족의 호응을 얻어내 나주를 점령하게 된다. 이로써 왕건은 나주평야의 풍부한 쌀을 얻고 또한 후백제를 위 아래에서 협공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얻게 되며 후일 학정을 일삼던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왕위 계승문제로 불화를 겪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해버린 후백제의 신검을 물리치고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삼별초는 몽고에 항복한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고 진도에 웅거하면서 자못 세력이 강하여 인근 지방 수령들이 맞이하여 항복하거나 진도에 가서 알현하였다. 나주부사 박부(朴王孚)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상호장 정지려 등이 고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달아날 일이지 나라를 배반하지 말라고 주장하여 나주와 인근 현에 기별하여 금성산성으로 들어가 가시나무를 세워 목책을 만들어 준비를 하였다. 삼별초군은 7주야동안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러 와서 김방경이 출전에 앞서 금성산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동학은 전라도 53개 고을을 점령하여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만은 굳게 성을 지켜 끝내 동학의 진입을 막았다. 나주는 동학토벌을 위한 모든 역량이 집중되면서 초토영이 설치되고 동학을 완전히 진압한 이후에는 모든 동학 지도자들이 잡혀와 현재 나주초등학교 터에 있던 전라우영에 갇히게 되고 이중 녹두장군 전봉준만 한양으로 압송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주에서 처형당한다.

이처럼 나주를 얻으면 대업을 이루고 얻지 못하면 초라하게 막을 내렸던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나주의 진산 금성산은 나주를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후삼국이 정립해있을 때 견훤이 왕건에게 패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나주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나주를 잘 지켜왔다. 특히 고려시대 나주를 중시하던 고려 왕실은 다른 지역보다 나주를 특히 우대하는 정책을 펴왔다. 이 때문에 나주는 왕실과 밀착되어 있는 지방이었다. 거란의 침입때 현종이 나주로 몽진하여 금성산성에 주둔했던 것은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충렬왕은 금성산에 정녕공이라는 작호를 내리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나주에는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이 단일산신을 모시는 5개의 신당이 생겨 무속인들의 고향이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상실사(上室祠), 산허리에 중실사(中室祠), 산기슭에 하실사(下室祠)와 국제사(國祭祠)가 있었고, 성안에는 이조당(爾祖堂)이 있었다.

금성산에서 신을 모시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 충렬왕 4년 금성산사의 신이 무당에게 내려 “진도와 탐라의 정벌에 나의 힘이 컸는데, 장졸들은 모두 상을 주고 나만 빠졌으니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해야 한다”고 하여 나주출신으로 보문각 대제를 지내고 있는 정가신이 왕에게 청하고 매년 나주의 녹미중 5섬을 사당에 주어서 춘추로 향·축·폐백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 그 시작이다.

금성당제는 조선시대에도 국왕이 향·축·폐백을 내려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국가신사였으며, 역병이 돌거나 재난이 있을 때면 국왕의 이름으로 제를 모셔왔다. 다섯 개의 신당 중 가장 늦게까지 남있던 곳이 이조당인데 그곳을 지금도 명당거리라 부른다. 그곳은 한 평 남짓한 건물로 하얗고 반질반질한 돌이 신체로 놓여 있었다 하며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성신사(錦城神祠)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금성당(錦城堂)이라는 명칭만 등장하는데, 금성당제(錦城堂祭)는 말하자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가제사로 이를 집행하는 곳이 금성당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무속인들이 모시는 금성대왕은 금성산의 산신으로 최근까지 산 아래 계곡 등에서는 산신의 영험함을 얻기 위해 정성을 드리는 무속인들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제주도의 표선면 토산본향당의 신은 나주금성산의 뱀신이 금바둑 옥바둑으로 변해 제주도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나주 목사고을을 서울과 비슷한 지세를 하고 있어 작은 서울이라 일컬었다. 금성산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을 비롯한 산세와 읍성 중앙을 통과하는 나주천, 남산 등이 서울의 지세와 같다는 점에서 그러한 말이 나왔을 것이다.


고려때 시인 김극기는『江南樂』이라는 노래로 금성산을 읊고 있다.


신령스러운 멧부리 매우 높다.
깊숙한 골짜기엔 호랑이가 돌을 차고 갔고
옛못에는 용이 구슬을 안고 조는데
달밤에는 뭇신선이 내려온다.
하도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한 뼘도 안되는데
솔숲 절 저녁 종소리 깊은 골짜기에 전하고
버드나무 마을 쓸쓸한 방아소리 외로운 연기가 가렸는데
새가 아니면 지날 수 없는 좁은 길이 위로 꾸불꾸불 이어졌네.


나주 한수제 위 장원봉에서 북쪽으로 향한 금성산 줄기가 동쪽으로 가지런히 잇달아 내려선 곳에 호남창의사 김천일 선생을 모신 정렬사, 동신대학교, 영평리 영안마을에서 금곡까지 금안동 일대, 오정리, 양천리, 광산 삼도 송학동과 대산동 등이 자리하고 있다.

금성산 북쪽 꽃재봉에서 가재등-평버등-사리등-망가리등-매봉으로 이어지는 언덕은 마파람을 가려주는 능선으로 여름철 태풍과 같은 강한 남풍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평평한 언덕 북쪽 턱인 반송과 인천, 월송마을은 이런 잇점을 누려왔으며 영안마을과 구축마을에서는 겨울바람까지 막는 배산이 되기도 한다.

금안동 북쪽 안산리에 있는 동네는 상한재에서 절고개로 뻗어 동쪽을 향한 구릉에 안겨 있다. 풍수학적으로는 양택풍수로 보면 두 용이 어장골이라는 작은 동네를 감싸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장제 밑으로 들녘이 있고 들판 아래 걸판진 들녘으로 나서는 번대기라는 땅이 있다. 번대기 아랫뜸은 금곡마을로 매화꽃이 떨어지는 매화낙지(梅花落地)형국이라고 전하며 혹은 옥녀탄금(玉女彈琴)형국이 덧붙여 있는 명당터라고 소문이 나 있다.

금안동은 네 성씨(나주정씨, 하동정씨, 풍산홍씨, 서흥김씨)의 집단 동족촌이다. 금안동은 사람이 살 터전을 찾으면서 물이 있어야 하고 들의 형세를 보며 산모양을 보고 흙빛깔을 보고 조산과 조수를 보고 얻은 터전이다. 금성산이 감싸안은 금안동은 역사를 자랑하는 쌍계정에서 지금도 대동계를 시행하는 마을로 이름나 있다.

금안동이라는 명칭은 나주정씨가 고려조에 명문가로 이름나게 한 대문장가 정가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금으로 된 말안장을 가져왔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인 신숙주가 태어난 마을이며 그 이후로도 수많은 명사를 배출한 곳이다. 이 마을에서 시행하는 대동계는 4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쌍계정 대들보 다락에서 정상(鄭祥)이 쓴 『금안동좌목중수서(金鞍洞座目重修序)』라는 글에서 밝혀졌다. 쌍계정은 정가신과 조선시대의 신숙주·신말주·홍천경 등이 학문을 닦으며 교유하던 곳으로 지금도 여름에 서당이 열리고 음력 4월 20일에는 대동계 계원들이 모여 선행상과 효행상을 시상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