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후

  • home
  • 역사속인물
  • 조선시대 이후
2015.07.16 15:05

김철

조회 수 292 추천 수 0 댓글 0

독립운동가 김철 
  
 철(金哲),본명은김복현(金福鉉)인 그는 1890년 10월7일 나주 이속 김창곤(김해김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김창곤은 그 이듬해 2월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을 규합 동헌을 습격한 후 탄압을 일삼던 참서관 안종수와 순검 2명 등을 처단하고 악질관리들을 가두는 한편 먼저 봉기한 장성의병과 북상을 준비한다. 그러나 국왕의 해산명령에 따라 의병이 해산되고 감창곤은 처형되었으며 재산마저 몰수당한 상태에서 가족들은 관헌의 박해를 피해 흩어져 참담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광주 부동다리 아래 작은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양림동 쪽에서 기독교인들과 숭일.수피아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일반 시민들은 서문통(지금의 광주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으로,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우체국 앞에서 충장로 파출소 쪽)을 거쳐 모여들었다. 사전계획에 없었던 지산면 일곡리에서도 이주선을 비롯한 수백명의 주민들이 합류했다. 숭일.수피아학생들이 선언문과 태극기를 나눠주고 김복현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지팡이로 위장했던 대형 태극기를 메달아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자리에 모인1천 여명의 시민들도 한목소리가 되어 따라 외쳤다.


이때 일경들이 중무장을 한 기마 헌병대를 출동, 무자비하게 주동자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김복현 역시 체포되었으며 당일 유치장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잡혔다. 모진 고문을 겪고 선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이 운동의 주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학생들은 그냥 돌려보내라. 내이름은 김철이다.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다내진다. 얼마든지 해볼테면 해봐라”고 당당하게 주장한 김복현은 이때부터 철이라는 이름을 갖게되었다. 3년형을 치른 후에도 ‘예비검속대상자’로 분류돼 항상 감시를 받았으며 어디서건 독립운동의 징후가 발견되면 유치장에서 지내야 할 정도였다.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한 김철선생은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된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강석봉, 국기열 등 3·1운동 이후 함께 해왔던 동지들과 힘을 모아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했고 이후 통일사회당으로 분리되면서 사회당 고문을 맡아 민주주의의 완성과 조국통일을 위한 마지막 투쟁을 전개한다.
그런, 그의 마지막 투쟁도 5·16 군사쿠데타로 짓밟혀 버렸고 1979년 민주주의와 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묻은 채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