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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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6 15:04

김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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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한 의병장, 김천일


19.jpg재 김천일(1537~1593)은 호남5현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학덕이 뛰어났으며 선정을 베푼 관리로도 유명하다. 그는 나주 외가인 흥룡동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몸이 허약하여 19세에 이르러서야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73년(선조6) 유일(遺逸:경륜을 품고 초야에 있는 인물)로 뽑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선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수원부사로 있을 때 양반 사대부층의 전답에 세금을 부과하였다가 그들의 비방으로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최경회 등과 호남의병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각지에서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창의사(倡義使)의 칭호와 판결사(判決使)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2차 진주성싸움이 벌어질 때 고립무원의 성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수성의 주장(主將)으로 수성전을 펼쳤다. 10만대병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으나 7주야에 걸친 공방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그의 진주성 싸움 참전은 전란의 참화를 입지 않고 보존되어 국가의 근간이 되었던 호남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비록 진주성은 함락되었지만 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진주성을 나와 호남으로 진군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1618년(광해10) 영의정에 추서되었고, 1627년(인조5) 문열(文烈)의 시호가 내렸다. 1745년(영조21) 부조묘의 은전이 내렸으며, 나주 정열사·진주 창열사·순창 화산서원·태인 남고서원·임실 학정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나주 정열사에서는 그가 나주에서 의병을 모아 출병했던 음력 5월 16일에 추모제를 올리며, 진주에서는 그가 순절한 음력 6월 29일에 나주·진주시민들이 함께 순의제를 지낸다. 그의 장자인 김상건도 일찍이 학행으로 천거받아 벼슬길에 올랐다가 2차 진주성 싸움때 부친과 함께 순절하였고 후에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이들의 묘는 현재 나주 삼영동 내영산마을에 있는데 실묘가 아닌 초혼장(招魂葬)이다.